자세히 들여다보니 햇빛에 지나치게 노출되면 기미나 주근깨 등 피부 트러블뿐만 아니라 햇빛화상, 피부노화, 피부암 등을 일으킬 수 있으니 피부를 보호해주는 자외선차단제를 발라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자외선A`는 긴 파장의 광선으로 세기는 약하지만 실내나 사무실, 자동차 안이라도 유리창이 있는 곳이면 어떤 곳에도 침투하니 날씨에 관계없이 연중 내내 자외선차단제를 발라야 한다는 것이다.
자외선A가 만일 이 정도로 피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면 누구나 `갑옷`을 입어야 할 판이다. 햇빛이 강한 낮에는 아예 밖에 나가지도 말아야 한다.
백색미인이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자외선차단제를 바르며 소일할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피부갑옷뿐이랴. 여름철이라서 그런지 여기저기서 피부에 관한 얘기가 많이 등장한다. 피부자아(le Moi-peau)도 그중 하나다. 이는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디디에 앙지외가 "자아는 곧 피부다"고 주장한 데서 나온 말이다.
그는 피부가 신체를 감싸듯 자아가 심리 전체를 감싼다는 의미에서 자아를 피부에 비유했고, 피부자아라는 신개념으로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도전장을 던진 주인공이다. 그에 따르면 피부는 결국 심리의 표면이며, 그 표면이 세상과 나의 경계라는 것이다.
물론 피부자아 이론의 핵심은 피부가 세상과 나의 경계라는 데 있지 않다. 앙지외가 밝히고자 했던 것은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환자들, 다시 말해 경계의 결여로 인해 장애를 일으키는 환자들이 심리적 자아와 신체적 자아,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 자기와 타인을 혼동한다는 데 있다. 앙지외가 말한 이 경계 장애자들을 위리엄 라이히식으로 표현하면 `성격갑옷(character armor)`을 걸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경계 장애나 성격 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대개 자신의 페르소나(Persona)와 내면을 가꾸기보다는 위장된 가면을 쓰고서 자신을 방어하는 일에만 급급해 한다. 중증(重症)일수록 이런 환자들은 정체성의 분열 때문에 고통스러워 한다. 때문에 실제 이들은 이중 삼중의 가면을 쓰게 된다. 그렇게라도 두꺼운 `갑옷`을 입어야만 자신을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한 개인, 건강한 사회는 자기방어용 갑옷이 필요하지 않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의식적ㆍ무의식적으로 걸치고 있을지도 모를 갑옷을 벗고 맨 얼굴, 열린 마음으로 상대를 만나 대화하고 상대를 이해하는 분위기와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이런 사회가 바로 투명하고 개방된 사회이며 정의로운 사회이다.
최근 우리는 모두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민간인 사찰 사태를 접하고 공분(公憤)했다. 방어기제가 필요 이상으로 작동된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를 더욱 당혹케 한 것은 그 일을 한 무리의 비밀클럽이 도모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에서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환자들`이 공적인 영역에서까지 활개를 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사건으로 인해 빚어진 의혹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사회와 정부가 지출해야 하는 기회비용은 천문학적 숫자가 될 것이다.
모범을 보여야 할 공인(公人)이 사사로운 데 눈이 멀어 갑옷을 겹겹이 입고 있다면 그 사회가 과연 건강한 사회일 수 있을까? 선거철이면 늘 갑옷군단이 등장한다. 자기만이 적임자라고 호기를 부린다. 책임은 회피하고 늘 상황 모면에만 급급한 정치꾼들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복지, 일자리 창출, 친서민 정책 등은 대체 그 번지수가 어디냐고?
[박치완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