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올해는 꼭 에어컨을 삽시다." 나의 강력한 요구에도 집사람은 늘 묵묵부답이다. 사실 집사람의 대답을 나는 오랜 세월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지구 환경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더위는 이겨내야 한다는 것. 작년 큰애가 고3일 때도 예외는 없었다. 이런 아내를 보노라면 밉기도 고맙기도 하다. "그래 우리 함께 버티자." 그러면서도 나는 늘 혼잣말을 하게 된다. 지구 환경도 좋지만 일의 능률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휴가철이 되면 사람들은 습관처럼 어딘가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 같다.
그러나 편의시설을 완벽하게 갖춰놓은 곳일수록 많은 사람이 시끌벅적하게 모여드는 법이라 휴가를 평화롭게 즐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몸은 시원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치여서 정신은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기 일쑤다. 문자 그대로 무위(無爲), 무욕(無慾)의 휴가를 보낼 수는 없을까.
상상력의 대가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공간의 시학`이란 책에서 "근심에서, 생각에서 해방된 사람은 더 이상 그의 무게 속에 갇혀 있지 않다"고 말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최근 휴가를 보내는 풍경이 이처럼 조금은 바뀌었다. 이제 사람들은 삶의 질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삶의 질은 양적인 부의 소유에 비례하지 않으며, 자본주의 논리를 `존경`할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 남들과 `다르게 살기`를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들과 다르게 살기 위해서는 자본 중심으로 굴러가는 현실을 바꾸려고 할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퇴직 전 미리 자기계발을 한답시고 증권이나 펀드 특강을 듣고, 부동산 시세를 연구하는 것 등은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가속시킬 뿐이다. 종말론자들이 세계의 비극을 앞서 과도하게 염려하는 것과 같이 스스로 회사에서 퇴출될 것을 전제하고 사전 포석을 놓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그럴 것이면 `죽을 각오로` 일하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
휴가는 바로 이런 사람을 위한 것이다. 또한 그렇다면 과연 누가 휴가를 즐길 자격이 있는지도 물어볼 수 있게 된다. 가족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휴가의 본래 의미는 라보리부스 바쿠우스(laboribus vacuus)에 있는데, 이는 휴가는 단순히 여행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휴가 중독증을 앓을 정도로 휴가 중에도, 휴가 후에도 피곤한 것은 휴가가 아니다. 휴가는 죽을 각오로 일하던 사람이 그 일을 놓는 것이다. 일에 대한 근심과 생각을 놓는 것이다. 아니, 자기 자신마저 놓는 것이다. 그때 진정 `나는 한가합니다(vacuus sum)`라고 외칠 수 있으며, 그때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일 수 있으리라.
최근 정부에서 공무원 휴가제도 개선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그 개선안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해야 하고, 관광레저산업도 활성화시켜야 하며, 내수까지 진작시켜야 하는 부담을 가진 것이라면, 그것이 과연 휴가를 위한 개선안일 수 있을까. 연가(年暇)를 정부 방침대로 쓰지 않으면 부서장의 인사 평가에까지 반영한다면, 그래서 단체로라도 어딘가를 다녀와야 한다면?
휴가까지 강요하는 사회에서 누가 과연 넥타이를 고쳐 매고 본인의 직장을 위해 죽을 각오로 일할 수 있을까. 유위사심(有爲私心)으로 처리한 일들은 늘 벽에 부딪힌다는 것을 정부에서는 아는지, 모르는지?
■ He is…
△1962년생 △한국외국어대 철학과 졸업 △프랑스 부르고뉴대학 철학박사 △한국외대 대학원 전 교학처장
[박치완 한국외대 철학과 교수](매일경제신문. 7월1일자 기사)